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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예식

묘제(墓制)2

묘제(墓制) 2


시신은 광실(壙室)에 관과 곽으로 담는다.  광실을 만들 때 돌, 구운벽돌, 나무로 쌓고 그 위에 하늘을 덮는 천개(天蓋)를 돌로 덮으면 석곽 이라 하고 나무로 덮으면 목곽 이라 한다.


관은 석재로 쓰면 석관, 나무로 쓰면 목관, 이라고 한다.  관(棺)과 곽(槨)의 구분은 옷과 외투의 구분과 비슷하다.  관이면 되었지 곽까지 필요한 이유는 침수와 함몰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요즘은 곽과 관의 구분을 잘 두지 않는다.  비용 및 팰요성을 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지 구분하자면 관은 운반용이며 곽은 유택용이다.  그래서 광실의 벽을 회벽으로 만들며 관곽위에 바로 성광한다.


옛날에는 장례때 시신을 관에 넣어 운반하다가 장지에 가서는 관에서 시신을 내어서 광속에 만들어진 곽에 넣고 관과 상여를 태웠다.


일부 섬지방에서는 시신을 입관하지 않고 몇개월간 집에서 좀 떨어진 주위에 시신을 풀로 덮고 초빈(草殯)해 두었다가 다시 남은 백골을 모아 깨끗이 씻어 입관하여 매장 하였다.  이장과 합장 할 때도 이와 같은 방법이다.


왕이나 귀족의 고분에서는 여러가지 부장품이 나온다.  그릇, 동전, 갑옷, 장식품이 많이 출토된다.  또 벽면에 산야와 조수의 그림, 사람의 생활상의 그림 등이 그려져 있다.


순장의 흔적이 보이는 고분도 있으며 산 사람을 대신한 토용도 발견되기도 한다.  왜 그랬을까?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고 내세를 함께 하려는 사상체계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가에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내세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시신은 효의 연장에서 이루어지므로 의복, 관대, 명정 등 부장품은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의 풍습에서는 관 속에 저승의 노자로 쓰라고 엽전이나 지전을 너어주는 지방도 있다.  여자의 관 속에서 예장지와 남편의 사주단자가 들어 있는 것을 보는데 살아서도 함께, 죽어서도 함께 하겠다는 동실동혈(同室同穴)의 뜻이 아닌가 보다.


지금은 부장품을 넣는 풍습은 사라졌으나 종교적으로 성서나 성물, 불경 등을 넣어줌으로 망자의 안식과 산 자와의 믿음의 고리를 연결해 주는 부장의 흔적은 그리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봉분이 끝나면 그 주위 및 광에 잔디로 때를 입힌다.  또 그 가장자리에 구목(丘木)을 심는다.  잔디를 입히는 이유는 비, 바람 등으로 광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묘 주위에 나무를 쭉 돌며 심는데 이는 묘를 현묘하게 하기 위한 조경이다.  나무로는 소나무와 동백나무를 심는다.  늘 사철 푸른 빛을 띠며 싱싱한 느낌을 주는 상록수이기 때문디다.


묘앞에 석물로서 상석(床石)을 놓는데 이는 묘사(墓祀)때 제수를 진설하기 위함이고 상석 앞에 향을 피울 향로석을 놓는다.  상석 전면에 000지묘(000之墓)라고 쓴다.  비석은 돌아가신 분의 업적이나 뜻을 적는 것인데 요즘 상석과 비석의 구분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다.  상석의 표지는 없고 따로 비석을 세우는 것도 보편화 되어 있어 비석은 표지의 개념이다.  비석은 제대로 산 사람이라면 세우지 않는것이 좋다.


좁은 덕을 키워서 비석에 크게 덕을 키움은 진정으로 돌아가신 분의 공적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  자손은 선조의 유업을 받들고 보전하여 승화시키는게 중요한 문제지, 선조의 묘 주위를 허례와 허식으로 꾸며 호화롭게 하는 것 자체는 조상을 욕되게 만드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덕은 스스로 자라서 나오는 것이나 금건과 물질과 말로 포장 한다고 그 덕이 좋아지는 것이 아님을 알자.


일반인의 묘는 봉분과 상석과 송백 몇 그루면 족하지, 호화로운 장식으로 꾸미거나 없는 공덕을 미화하여 비석을 세우는 따위의 부질없는 행동을 아니하는게 좋다.


요즘 공원묘지에는 비석을 세우는데 공덕은 없고 망자의 손과 이름과 졸한 날, 그 자손을 적는데 이는 비석의 기능보다는 표지의 의미를 더 강조한 듯 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정의 관리 및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들은 묘를 꾸미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묘앞에 묘비를 세우는데 묘도비, 신도비 라고도 하며 묘지, 비석, 비갈이다.


비는 뛰어난 분의 비를 높여 말한다.  비의 앞면에는 망자의 본과 명을 밝혀 적으며 뒷면에는 망자의 세계와 인품, 공덕, 자손을 적는다.  묘비를 세울 때는 상석에 아무것도 적지 않는다.


망두석(望頭石)은 장승과 같은 의미로 묘의 아래쪽 양 옆에 세우는 것으로 묘역을 표시하는 석물이다.  망두석은 망주 라고도 한다.  경계석이란 봉분의 둘레에 돌을 따듬은 숙석을 둘러 쌓아 봉분이 비바람이나 세월로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고 미관을 좋게 하기 위해 1 ~ 2단으로 만든다.   더 좋은 봉분은 대체로 경계석을 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묘의 호화나 성역은 오히려 조상에 대한 예가 아님을 인식해야겠다.  옛 묘나 호화묘를 보면 문인상(文人象), 무인상(武人象)이 장식되어 있다.  왕이나 조정 큰 대신의 묘에 죽어서도 동서반(東西班)의 신하가 있음을 나타내거나 왕의 신하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묘 앞에 간혹 석화등(石火登)이 있는 곳이 있다.  석화등은 불교의 영향으로 본다.  사찰에는 석화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망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여 밝혀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근래에는 단순한 장식 조각품으로 쓰여질 뿐이다.


우리는 장례 예식을 엄숙하게 하고 묘를 정성껏 만들며 돌보는 근본 정신은 효에 있다.  효를 이루는 모습은 형제간의 우애와 친족간의 족의(族誼)와 조상숭배로 나타난다.  망자가 살아 있을 시 극진히 효도하고 돌아가신후 묘를 돌보고 제사를 정성껏 함은 효사상이 우리생활에 녹아서 이루어진 윤리의 표현이다.


남의 죽음에 우리는 어떤 예를 갖춤으로써 자기의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과 함께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식을 행함으로써 인간관계가 성립되며 이는 하나의 성숙된 문화인이 되는 것이다.


출처 : 전웅남선생님의 상. 장례의식 중에서 나유정역학연구소 편저 010  8126  7250

필자 나유정은 ......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들 개개인의 이성을 동양철학과의 상관성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동양학의 신비에 매료되 교사를 퇴직하고, 원광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한편 나유정역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레이디경향 이달의 운세 작가로서 10년간 집필함. 개인상담도 해 드립니다.상담료가 있고 전화와 면담등 모든상담은 미리 예약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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