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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역

분서갱유(焚書坑儒)와 사구평대(沙丘平臺)

분서갱유(焚書坑儒)와 사구평대(沙丘平臺)


'한위제초연조'라는 육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짓는 등 큰 공사를 많이 했죠. 그 진시황이 무병장수를 위해 서시(徐市)라는 사람한테 동남동녀 500명(장가 안 간 총각250명과 시지안 간 처녀 250명)을 딸려보내면서 "저 동쪽에 삼신산이라는 산이 있고 거기에 불사약이 있으니 그것을 가져오라" 고 했습니다.  


서시가 명을 받아 동남동녀 500명을 이끌고 찾아간 삼신산이 우리나라 제주도 한라산입니다.  서시는 동남동녀 500인을 이끌고 산신산인 한라산에서 불사약을 캐가지고 서귀포(西歸浦)로 해서 귀항하다가 폭풍을 만나 일본으로 가게 되는 바람에 일인(日人)의 시조가 됐다는 말도 전해옵니다.


진시황은 대대손손 제위를 보위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했죠.  그래서 '사람이 배우고 똑똑하면 대들고 내 것을 빼앗으러 할 터이니, 모두 소와 말로 만들어 이리저리 끌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배우지 못하도록 책들을 모두 불태워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선비를 그대로 두면 책이 나올 것이다.'  라는 생각에 갱유생(坑儒生), 즉 선비를 모두생매장 해 죽었어요.  그러고도 또 생각해보니까 ' 공자의 사당을 그냥 놔두는 한, 그 사상(가르침)이 한동안은 잠잠할지라도 다시 또 선비가 나오고 책이 나올 것이다.  해서 공자의 사당을 허물고 위패를 불태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후세에 한 사나이가 나와서(後世有 - 男子)내사당에 들어와(入我當) 내유품을 모두 부수고(毁我冠裳훼아관상)'사구평대'에 가서 죽으리라(졸어사구평대 卒於沙丘平臺)"고 씌어 있는 글귀를 보고 두려운 나머지 결국 공자의 사당을 허물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훗날 진시황이 길을 가는데 저만치서 아이들이 모래를 쌓고 있길래 뭐냐고 물었더니 '모래사(沙)'자 언덕구(丘)'자의 '사구' 라 하고 또 그 옆으로 가보니 아이들이 모래를 쭉 펴놓고 그 위에서 뒹굴고 놀고 있길래 뭐냐고 물으니 '평할 평(平)'자를 '집 대(臺)'자의 '평대'라고 답하였답니다.  그런데 실제로 진시황이 이 사구평대에서 죽었다는 것이죠.


진시황이 죽고 진나라가 망한 뒤에 한나라가 섰습니다.  한나라의 늙은 선비들이 아는 대로 글을 외워내고 칠서벽경 속에 들어 있던 글을 찾아내서 한나라 때 글이 다시 나오게 됩니다.  이글을 '한문(漢文)'이라 함은 한나라 때의 선비들이 처음 만들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글이 진시황이 불태운 수난을 겪은 후 한나라 때 다시 중흥되었다는 의미로 한문인 것이죠.


한편 진시황이 서책을 불태울 적에 보니까 주역이 나오는데 점치는 글이어서 두고두고 써먹으려는 속셈으로 의약서적들과 함께 불살 지 않았습니다.  


주역은 공자가 최종적으로 마무리 집대성한 후, 진시황이 불울 태우는 수난 중에도 그 위기를 잘 모면했던 글입니다.  그래서 칠서벽경 가운데서도 다른 글을의 경우는 좀이 먹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거나 책을 얶은 가죽끈이 끊어져 문장이 착간(錯簡)된 곳이 많지만, 주역은 원전 그대로 전해져왔다고 합니다.

참고자료: 대산주역 강의 중에서-

제공 : 나유정역학연구소  010  8126  7250

필자 나유정은 ......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들 개개인의 이성을 동양철학과의 상관성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동양학의 신비에 매료되어 교사를 퇴직하고, 원광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한편 나유정역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레이디경향 이달의 운세 작가로서 10년간 집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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